[긴오키] 편애 (3)
*긴토키X오키타
편애
(3 편)
“제 말을 듣는 게 좋을 텐데요. 말리진 않겠지만.”
“잘나디 잘난 분께서 몸매 괜찮은 여성분과 질척한 하룻밤을 보내시는데 괜히 제가 끼어들 수는 없는 노릇이죠. 상관을 보좌하는게 비서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그냥 전 집으로 향하겠습니다.”
“그럼 저도 따로 신경은 쓰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꼭 집에 들어갈 때 모든 잠금장치는 다 해두고 주무셔야 합니다. 첫 날이라 무탈하게 지나갈 수도 있겠지만 악질적인 놈들이라 신입이라고 봐주지 않는 경우도 많으니까요.”
“예?”
“제 수행비서는 주기적으로 습격을 받거든요. 주로 수면시간에. 일종의 협박성이 짙은 장난이지만 그 장난에 죽어나간 사람도 꽤 되니까 조심하는게 좋을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사장을 습격하는 것도 아니고 이사장의 수행비서를 왜 습격하는데. 철통보안을 뚫지 못하니까 그 따까리라도 해결하자 이거야 뭐야. 뒤숭숭한 마음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가려하니 하드디스크 하나와 종이 하나를 쥐어준다. 의아한 눈으로 올려다보자 매혹적인 미소를 띄며 아까 그 컴퓨터에 저장되어있던 파일의 복사본과 응급상황에서 그에게로 연락되는 일종의 긴급회선이란다. 급할 때는 그 쪽으로 전화하면 보안 요원들이 바로 움직일 테니 뒷덜미가 싸하다 싶으면 연락하라는데, 목숨의 위협을 느껴본 적이 없는 사람이 과연 제정신으로 긴급회선에 연락을 넣을 수 있을 지가 의문이다. 아마 넣지 못할 것 같은데. 그나저나 내가 왜 내 목숨을 걸고 이런 일을 맡아야 하는데. 생명수당도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아무리 개 취급을 한다고 해도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을 말도 없이 시키는 건 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이거 생각보다 머리가 없잖아.”
“누님께서 많이 편찮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오키타 미츠바. 맞습니까?”
“……. 인간적으로 가족을 건드리는 건 옳지 않다고 보는데요? 이거 상종도 못할 인간일세.”
“그 분의 병원비부터 시작해서 후에 노후자금까지 보장해드리겠습니다. 물론 오키타씨가 지속적으로 좋은 일의 성과를 내는 한도 내에서요. 그리고 오키타씨의 안전도 보장해드리겠습니다. 물론 본인 사저에서 머무르신다면 약간의 딜레이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업무에 방해를 받지 않게 해드릴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보너스도 드리지요.”
“거절도 못할 조건을 내걸으셨군요.”
“그만큼 철저한 보안을 요하는 일이니까요. 어려운 일이기도 하고.”
아무리 봐도 신뢰관계라고는 하나도 없는 사람에게 파격적인 혜택을 쥐어주면서까지 써먹으려는 꿍꿍이가 의심되기는 하지만 일단은 그러려니 했다. 그나저나 다들 말하던 것과는 달리 말투는 싹수가 노랗지만 나름대로 자상한 면도 있고, 별로 남의 행동에 신경을 세우는 사람도 아닌 것 같아 보이는데 어째서 소문이 과묵하고 예민한 사람으로 나있는 지는 의문이다. 더군다나 먼저 사가루 킨씨가 올라간다는 모습을 봤는데 킨씨는 어디가고 이사장만 덜렁 있는 지도 의문이고. 이러나 저러나 좋은 게 좋은거라고, 제게 온 기회를 놓칠 생각은 없었다. 위험해 보이긴 하지만 안전을 보장해준다고도 했고, 누님에게도 도움이 되는 처사인 것 같았으니까.
이만 가보겠다는 말을 한 이후에 짐을 챙겨서 돌아가려니 두툼한 팔뚝이 보이고 달큰한 향기가 코에 끼쳐 들어왔다. 당황으로 몸을 긴장시키는데 꽤 매력적인 미소를 지어 보이며 문을 열어주는 남자가 보인다. 피로가 심한지 충혈된 눈이지만 나른하게 풀어져 말갛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심장에 해롭다.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페로몬을 뿌려대는 사람과 어떻게 사나. 잘 부탁한다며 귓가에 속삭이듯 스치고 지나가는 목소리가 아득하다. 뒷골이 팍 땡겨오면서 긴장에 멎어있던 숨이 문이 닫히고 나서야 가득히 내쉬어진다. 여러모로 무서운 남자다. 여러모로.
결론적으로 사저에 돌아와서도 머릿속을 가득 채운 건 우습게도 이사장이라는 작자다. 은빛으로 물들어 천계에서 내려온 천사와도 같지만 풍기는 음험함은 심연을 가져다 놓기라도 한 듯 짙고 음습하다. 머리가 어떻게 되었나 싶어 머리를 짚어보지만 마지막에 보았던 이사장의 웃음을 떠올렸을 무렵엔 단지 두통이 문제가 아니었다. 얼굴 전체에서 열을 뿜어내는데 식힐 도리가 없다. 웃는 모습이 너무 야하잖아. 이건 내가 이상한게 아니라 이사장이라는 작자에게 문제가 있는 거라고.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그 얼굴을 보고 있었어도 이런 반응이었을걸? 필사적으로 뭔가 간질거리는 단어를 무시하고는 답답한 머리라도 식힐 겸 옷을 벗어 던지고 욕실에 들어선다. 샤워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가 시원하게 머리통을 후려갈기니 좀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기분이다. 여태까지 뭔가에 홀린 듯 멍하던 기분이 진정된다.
트렁크만 하나 챙겨 입고 옷가지를 정리하자 옷자락에서 초콜릿 향이 자스민 향과 함께 짙게 묻어난다. 머리를 어지럽게 하는 향이다. 심각하게 묘한 향에 얼굴이 일그러진다. 맡고만 있어도 몽혼하게 다리가 풀리고 머리가 멍해지는 향이다. 이런 향을 풍겨대는 남자 앞에서 필터링 없이 지랄을 떨어댔던 입이 새삼 대견해진다. 몸은 침잠하는데 입만 동동뜨는 형국이 아니던가. 겨우겨우 수면에 붙어있던 주둥아리 덕분에 부족한 숨을 간신히 이어갔던듯 하다. 꽤 매력적인 대가, 아니 거절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대가에 딜하고 돌아왔지만 새삼 그런 남자와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급 결정을 선회하고 싶은 생각이 불쑥 찾아 든다. 머리를 어지럽히는 생각을 털어버릴 요량으로 머리카락을 털어버리고 옷가지를 정리한 이후 그의 향이 풍기는 옷에 방향제를 장하게 뿌리고 나서 앞으로 저의 일이 될 하드디스크를 들어 올린다. 일찍 들어가라는 명령 하에 해가 중천에 떠있음에도 집에 들어와 앉아있으니 할 일도 없다. 지루하게 앉아 그 남자 생각을 하느니 일이라도 하자는 심보다.
‘ 히지카타 토시로 ‘
‘ 까칠한 면이 있으며 원리원칙을 굉장히 중요시 여김. 팀원을 매우 아끼며, 상관인 곤도 이사오가 많이 의지하는 인물임. 다만 오키타 소고 과장과의 잦은 트러블이 있는 것으로 보임. 업무에 방해되는 정도는 아니며, 주변 지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둘의 사이가 그리 나쁜 편은 아니라고 사료됨. 업무수완은 뛰어난 편이나 원리원칙을 너무 중요시하는 탓에 일의 진척이 느릴 때도 있음. 그 외에 특이사항은 애연가이자 마요네즈를 매우 좋아한다는 점. 특진을 제의받은 적이 다수 있으나 모두 거절함.
‘ 업무평가 : A (승진 예정) ‘
‘ 곤도 이사오 ‘
‘ 고릴라 ‘
‘ 업무평가 : C ‘
업무평가와 간략한 사원들에 대한 개요가 적혀있다. 머리를 긁적이며 읽다가 익숙한 이름들을 한 번 훑어보고 꽤 정확하게 중심을 짚은 내용에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그 가운데 나에 대한 내용은 적혀있지 않았으나 각각의 사람들에 대한 특색이 생각보다 자세히 작성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사가루 전무는 다른 사람들을 통해 정보를 추합하여 이와 같은 보고서를 만들지 않았나 싶다. 그래도 그렇지 고릴라는 좀 심한데. 이왕이면 술집에 드나들며 돔페리뇽을 외치는 고릴라고 하면 몰라도. 히지카타에 대한 내용은 너무 미화가 많이 된 것 같단 말이지. 골초에 마요라에 버러지 같은 놈이라는 설명이면 충분한데. 남은 공간없이 빡빡하게 서류들로만 채워진 하드디스크를 뒤적거리다가 페이지를 돌려 검색창에 블랑 드 블랑을 쳐보니 수 많은 술의 이름들이 나열되어 나온다. 아르망 드 브리냑 블랑 드 블랑. 약 200만원이라. 무슨 술 한 병이 노트북 하나 가격이야.
풀석 책상에 엎드리며 켜져있는 창들을 닫고 컴퓨터를 종료시켰다. 잠시 파일을 확인해보고 술을 주문하고 나니 시간은 훌쩍 지나 저녁이다. 이사장을 맞이 한답시고 아침도 거르고 이사장이랑 만난 다음 넋이 나가서 점심도 거르고 나니 아침부터 식사를 한 적이 없다. 미친듯이 배가 고픈데, 누님 병원에도 한 번 들렸다 오려면 지금 식사하기엔 너무 시간이 애매하다. 그지같네. 아마 내일도 입고 가야할 것 같은 정장을 옆으로 미뤄두고 침대에 난잡하게 어질러져 있는 옷들 중에 후드와 청바지 하나를 골라 입었다. 내내 앉아 있어 뻐근하게 당겨오는 허리를 풀어주니 우드득 하는 익숙한 소리가 들린다. 몰려오는 졸음에 눈을 비비고 하품을 한 번 한 다음에 대충 빵 사먹을 돈이랑 핸드폰만 챙겨 밖으로 나선다. 병원에 들렸다 오는 길에 빵으로 배라도 때우면 되지 싶다. 지나가는 택시를 골라잡고 병원으로 향하니 가는 길이 꽤 어둑하다. 시간은 약 7시 정도. 퇴근하기엔 이른 시간이니 병원에서 거지 같은 마요라의 상판떼기를 보지 않아도 되리란 생각에 마음이 편하다.
병원에 도착해 누님의 병실에 들어가려 하니 뒷골이 싸하다. 뭔가 불안한 마음에 병실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가자 빛무리가 흘러 넘치는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누님의 모습이 보인다. 행복하게 웃으며 그 남자와 대화를 하다 이쪽과 눈을 마주치고는 해사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온다. 누님의 인사에 누님과 대화하고 있던 작자도 뒤를 돌아본다. 붉은 눈. 내리 오후의 한적함을 괴롭히던 붉은 눈의 남자가 제 눈에 보인다. 남자는 따로 아는 척을 하지 않고 누님에게 인사를 한 이후 내 어깨를 가볍게 짚고 밖으로 나선다. 당황스러움에 남자를 잡아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으려 하려는 찰나에 제 이름을 부르는 누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혼란스럽게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어차피 내일 만나게 될 제 상관임을 깨닫고 누님 곁으로 다가간다.
“누님, 저 남자가 누님을 왜 만나러 왔대요?”
“음, 난 소고가 저녁은 먹었는지가 더 궁금한데. 소고는 저 남자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한가봐?”
“아……. 저녁은 먹었어요. 그냥 누가 누님을 찾아왔다는 것에 놀라서요.”
“소고 상관이라던데, 소고덕분에 많은 것을 누리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하러 오셨단다. 그런데 누나는 소고가 무슨 위험한 일에 휘말린 건 아닌지 걱정이 되네.”
“에이, 누님이랑 평생 살아야 하는데 설마 위험한 일을 맡았을까 봐요. 그냥 좋게 보셨나 봐요. 윗분들이.”
걱정스러운 눈빛에 다정함이 깃들어있다. 단 하나뿐인 누님이다. 모자란 동생 하나 키우겠다고 홀로 동분서주하다가 병까지 얻은 누님이시다. 그런 누님이 못난 동생 하나 담보로 호사를 누릴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지 않을까. 어쩌면 남자는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서 그런 대가를 지불하겠다고 했을 것이다. 그런 조건이라면 제 목숨이 위험해진다고 해도 나는 바로 동의했을 테니까. 그 다른 누구도 아닌 누님의 행복이 걸려있는 일이니까. 지금보다 큰 병원으로 옮겨 검사를 받고 치료를 받으면 훨씬 몸이 괜찮아 질 테고, 병이 치료되면 누님은 누님의 행복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베시시 웃으며 누님의 가냘픈 손을 잡아본다. 그 온기가 따스해서 그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남자가 어떻든 무슨 상관인가 싶다. 이 따스한 온기만 유지할 수 있다면 이미 자신은 무엇이든 하겠다 마음먹은 지 오랜데.
가벼운 담소를 마치고 나오니 벽에 기댄 채로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남자가 눈에 들어온다. 은발에 적안. 누가 봐도 이사장이다. 어째서 그가 병원 복도에 앉아, 그것도 누님 병실 앞에서 핸드폰을 확인하고 있는 지는 몰라도 분위기상 그냥 지나칠 수는 없어 그의 앞에 가만히 서 있는다. 그러자 남자가 핸드폰에 고정했던 눈을 떼어내며 이쪽을 바라본다. 지독히도 무심하지만 색정적인 눈이다. 손 끝에는 누님의 온기가 남아있는 것만 같은데 그 위로 저릿저릿한 떨림이, 그의 존재가 내게 미치는 영향이 그 온기를 집어 삼키고는 또 다시 나올 수 없는 늪에 가둬 놓는 듯 하다. 사자 아가리에 머리를 집어 넣은 사람의 위기감이 이러할까. 아니, 사자가 아니라 황룡이었지.
“가죠.”
“네?”
“가자 했습니다만.”
“어디를요?”
“밥 먹으러요. 밥 아직 안 드셨잖습니까. 키도 조막만해서 밥 안 먹으면 키 안 큽니다.”
“갑자기 왜 밥을 먹으러 가자 하십니까? 저, 퇴근했습니다. 굳이 이사장님 비위 맞출 필요는….”
“아직 밥 드시지 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비위 맞추라 한 적 없는데요. 밥 사준다고 기다렸을 뿐입니다. 앞으로 매일같이 얼굴 볼 텐데 친해질 겸 해서.”
뭔가 회사에서 만났던 이사장과는 다른 모습의 다른 사람같다는 느낌을 버릴 수가 없다. 굉장히 거슬리는 말투를 사용했던 이사장과는 달리 뭔가 다르다. 경박한 말투를 사용하지만 낮고 깊은 목소리와 코가 찡해질 정도로 달콤한 향기는 분명 이사장의 것이 맞는데……. 뭐가 뭔지 모르겠다 싶은 생각으로 그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니 그 얇은 입술을 매력적으로 휘어 보이며 밥 먹으러 갈 것을 종용해온다. 그리고 우습게도 난 그의 말에 거부를 표하지 못한다. 대놓고 배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데, 그 소리를 듣고 남자의 눈이 웃음을 담는데, 거부를 표하는 게 더 우스운 일이지.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가 몸을 일으켜 세우며 내 어깨에 두툼한 팔을 올린다. 그의 향이 어지러울 정도로 깊게 풍긴다. 미치도록 좋은 향기에 중독되는 것만 같다. 젠장, 먹다 체하는 거 아닌가 몰라.
“그나저나 뭐 먹으러 갑니까? 뭐 개 운운하시면서 사료 준비해두신 건 아니겠죠?”
“사료치고는 비싼 음식이죠. 그리고 일전에 개취급 한 건 현 위치를 직시하라는 의미였을 뿐입니다. 이사장의 개. 앞으로 수도 없이 많이 듣게 될 말인데, 미리 들어두면 항마력이 높아지지 않겠습니까.”
장난기가 밴 눈으로 이쪽을 응시하다 먼저 차에 올라탄다. 순간 교육을 받았던 대로 운전대를 내가 잡아야 하는 건가에 대해 고민스러워지지만 능숙하게 차를 내 앞에 대령하시는 솜씨에 이미 퇴근한 다음이니 상관없을거란 생각으로 차를 얻어탄다. 차 안에는 그의 향이 가득하게 퍼져있다. 뽑은 지 얼마 안된 차량인지 가죽냄새가 올라오지만 그의 짙은 향이 코를 미친 듯이 자극시키는 바람에 특유의 가죽냄새는 별로 신경 쓰이지도 않는다. 안전벨트를 매고 정면을 바라보고 있으니 남자가 탁월한 운전솜씨로 부드럽게 도로를 주행한다. 이어지는 침묵에 간간히 말을 걸까 싶다가도 그의 종잡을 수 없는 페이스에 가만히 입을 다물 뿐이다. 말을 먼저 건 것은 이사장 쪽이었다.
“제 이름은 사카타 긴토키입니다. 아직 통성명도 안 하지 않았습니까.”
“아, 네. 전 오키타 소고입니다.”
“오키타씨는 누님을 많이 아끼시는 것 같더군요. 사이가 많이 좋아 보였습니다.”
“부모님께서 돌아가시고 누님께서 절 돌봐주셨으니까요. 빚을 갚을 뿐입니다. 당신을 희생해서 날 키워주신 것에 대한 빚을.”
“그렇군요. 빚이라.”
별 다른 표정의 변화는 없었지만 깊게 침잠하는 눈동자를 통해 그가 깊은 생각에 빠졌음을 예상할 수 있었다. 조용한 주행.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자리에 앉아 다른 생각을 하며 한 곳을 향해 가는 순간이 묘하다. 손끝이 저릿할 정도로 다가오던 떨림과 기사대신 본인이 주행하는 그에게서 느껴지는 이질감. 손끝을 까득이다 창 밖을 바라보니 어둑하던 밤 하늘은 남색으로 물들어 있고 별과 달이 가득한 밤하늘을 대신하여 가로등이 이 밤을 밝히고 있다. 꽤 빠른 속도로 주행하는 차내에서 보이는 빛의 번짐이 아롱인다. 빛이 일그러지고 새로운 빛의 몽환이 그 빈자리를 끝 없이 채운다. 눈을 감아도 망막에 남아있는 빛의 잔상이 기다란 스펙트럼이 되어 그려지는 것만 같아.
도착을 한 곳은 작고 소담한 술집이었다. 이미 문을 닫은 지 오래인 듯 텅 빈 주차공간과 공간을 비추는 빛이 없다. 의혹이 섞인 눈으로 이사장을 바라보지만 차에서 내려 주름잡힌 옷을 털어낸 남자는 닫혀있는 문을 몇 번 두드리고는 안으로 들어간다. 별 수 없이 차에서 내려 그를 뒤따라가니 ‘달칵’ 차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려온다.
밖에선 보이지 않았던 희미한 빛이 내부를 비춘다. 앞에서 은빛을 발하며 움직이는 남자를 따라 안으로 들어서니 적막 속에 그와 내 발자국 소리만이 유달리 크게 울린다. 여유롭지만 느리지 않은 걸음걸이를 따라하며 가다보니 그의 발소리와 내 발소리가 맞닿아 동시에 울린다. 누군가 보면 우스운 개그 프로라 생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지나친다. 한참을 희미한 빛과 남자에 의지해 안으로 들어가니 음식냄새가 희미하게 공기에 묻어난다. 허기진 배에서 주책맞게 배곯은 소리를 열심히 울려댄다. 남자의 두터운 목에서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온다. 얼굴에 열이 홧홧하다.
“좀 더 일찍 올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늦었네?”
가벼운 목소리다. 익숙하게 귀에 감기는 목소리지만, 식당에서 들릴 법한 목소리는 아니다. 남자가 환한 빛이 쏟아지는 문으로 들어서며 익숙하게 의자를 끌어내고 자리에 앉는다. 대단한 한상차림을 차린 장본인은 그런 이사장의 태도에 일언반구하지 않고 이쪽을 향해 반갑다는 듯이 인사를 해온다. 찰랑이는 금발이 반짝인다. 느긋한 사자의 붉은 눈이 생기를 담은 채 활짝 웃는다.
“사가루 전무님께서 왜 여기 계시는 겁니까?”
“긴토키가 내 밥이 아니면 밥을 잘 안 먹거든. 한식구가 된 기념으로 신입에게도 밥 한 상 차려주고 싶기도 했고.”
“예?”
“말 그대로 앞으로 꾸준히 같이 일하게 될 사람들끼리 반 한끼 먹는 정도는 늘 상 있었던 일이니 어색해 말고 앉아 드세요. 저래 뵈도 음식 솜씨는 호텔 주방장보다 좋으니까 먹을 만 할겁니다. 서로 한 번 만났을 테니 굳이 인사는 필요 없겠죠?”
단정적인 말투에 사가루씨에 대한 애정이 배여있다. 오랫동안 쌓여온 신뢰관계라는 건가. 눈을 내리까니 김이 나는 밥 한 그릇이 눈에 보이고 진수성찬은 아니어도 신경을 각별히 쓴 듯한 반찬들이 놓여있다. 언제 이런 밥상을 먹었더라. 꽤 오래된 것 같은데. 매번 도시락 인생만 이어가다가 꽤 오랜만에 만나는 밥상에 신기함이 앞선다. 남자를 흘긋 보자 이쪽은 신경 쓰지도 않고 밥을 드시고 계시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그득하게 쌓인 밥그릇을 보고 밥을 한술 떠서 입에 가득히 집어넣는다. 뜨겁다. 반찬을 입에 우겨 넣으니 입 안 가득히 폭죽처럼 다양한 맛의 감각이 혀를 감싼다. 그 감각이 너무 행복해서 속에서 뭔가 끓어오르는 기분이다.
갑작스러운 일들이 발발했던 하루다. 갑작스레 들이닥친 이사장과 갑작스레 맡게 된 일과 갑작스레 맞이하게 된 감정과 갑작스레 마주앉아 입에 우겨 넣는 음식까지도. 그 갑작스러운 마주침에 하루 종일 얼마나 허둥댔던가. 단 한번도 제 페이스대로 움직인 적이 없다. 하지만 오늘은 이대로도 좋지 않을까. 따듯한 밥과 맛있는 반찬. 변화가 일어난 하루치고 마지막의 행복이 기꺼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