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오키] 홍화 (1)
* 긴토키 x 오키타
홍화
(1 편)
붉은 색은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칼을 쑤셔 내장이 부서지면서 쏟아져 내리는, 살조각과 내장이 흐르며 드러나는 탁한 혈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가슴 근육을 비틀고 들어 간 날붙이가 명확하게 심장을 꿰뚫었을 때 날 붙이에 나있는 혈조를 따라 흐르는 선홍의 혈류에서만 나타나는 색상. 하얀 종이에 먹물이 번지듯 몸에 지니고 있다 처음으로 세상에 드러났을 때 보이는 수줍고도 가장 화려한 선홍의 꽃 잎. 인간이 생명을 지니고 있다는 증거는 언제나 질리지 않는 선홍의 빛. 붉게 물들어 화려한 색상을 자랑하는 비단포를 볼 때면, 그 보다도 영롱한 선홍의 빛이 눈을 희롱하며 인간이 피워올리는 홍화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살욕을 이기지 못하고 검을 휘두를 때면 그 때마다 검 끝에서 피워올리는 홍화가 만연하게 계속 피어나길 바란다는 마음이 온 몸을 가득히 채우며 쾌감을 제공한다. 생명이 흩뿌려지고 비릿한 혈향이 공간을 가득히 채우면서 검에 취해, 광적으로 갈구하는 무언가를 바라기에 휘두르고 또 휘두른다. 그 때마다 혈무가 자욱하게 끼며 세상이 선홍의 색으로 변모하는 모습은 취할지언정 잊지 못할만큼 아름답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고통으로 가득 찬 비명소리가 곱다한 음률이 되어 고막을 기분 좋게 울리곤 한다. 언제나 아름다운 음악이다. 생의 끝에서 인간이 내뱉는 곡소리란건.
" 어이. 회 뜨는 것도 아니고 너무 오랫동안 잡는 거 아니야? "
반 쯤 미쳐 날 뛰던 검 끝이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그 움직임이 멈춰졌다. 묵직하게 깔려오는 기세에 순간적으로 몸이 위험을 감지하고 그를 막아내기 위하여 움직였던 것. 두 검이 닿으며 흘려낸 소리는 캉-. 하는 쇳소리였으나 막상 자신의 검에 맞부딪혀 온 것이 목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몸을 추스르며 두 발 자국 물러났다. 선홍의 혈무가 걷히고 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피투성이의 세계와는 어울리지 않는 하이얀 유카타자락.
무심한 눈 빛에 유달리 허연 피부를 가진 그는 유약한 학자 이미지는 아니었으나, 세파에 찌든 일반인과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누군가의 개가 되어 굽실거릴 지언정 이런 데에 나설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의심쩍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자 검붉은 눈동자를 도록이며 귀찮은데..를 연발하며 자신의 검을 막아낸 목검으로 어깨 부근을 두들기듯 톡톡 치며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온다. 대체 어떤 의도로 끼어들었으며, 어떤 의도로 자신의 유흥을 깨었는지는 몰라도 심히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선홍이 아닌 검붉은 눈동자부터 도려내고 싶을 만큼 마음에 들지 않았다.
" 그 쪽은 뭐죠? 뭐, 아직 죽이진 않았습니다만 죽일 생각인데 말리지 않고 보고만 있을 생각인가요? "
" 아아, 긴상은 귀찮은 건 싫은데... 그래도 아는 얼굴들인데 죽이지 않으면 안 될까? "
" 이런이런, 제가 그 쪽 말을 들어줘야 할 의무라도 있던가요? "
" 왠지 모르게 그 얼굴로 그런 말을 하니까 언발란스하긴 하지만 소라치의 선택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
목검의 끝이 턱 끝에서 목 중앙으로 천천히 이동해온다. 검을 든 사람치고 처음에 흘렸던 기세는 어디로 갔는지 흉험한 기세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 한 번의 행동에 그의 눈이 경고를 보내고 있다는 사실은 본능으로 알아차리기에 충분했다. 위험한 눈. 아수라의 눈도 패왕의 눈도 아니지만, 살인을 해본 자의 눈이 분명했다. 강한 혈향이 풍기는 것은 아니었으나 한 없이 절제되어 여유마저 느껴지는 행동 하나하나가 은근한 압박을 보내왔다. 검을 잡는 형세가 익숙해보인다. 손에 약간의 긴장과 함께 땀이 흐른다.
" 그 얼굴로 살인을 하는 것도 막는게 소년 만화 주인공으로써 할 일이겠지. "
" 그 쪽도 살인을 해봤던 것 같은데, 동지끼리 그냥 넘어가도 되지 않나요? "
" 아아, 살인말이지. 긴상도 살고 싶어서 진검을 잡고 몇몇의 목숨을 날리긴 했지만, 내 손으로 보낸 생명의 무게가 무거워서 목검을 들고다니는 거라고. 그러니까 그 무게를 알게 되기 전에 꼬맹이 하나 구제하는 셈 치고 겸사겸사, 귀찮긴 하지만. "
여전히 여유로운 태도로 검을 지탱하고 있는 그에게 발검을 하면서 최대한의 빠르기로 다가서보지만 검에 베여 하늘거리며 떨어져 내리는 건 어두운 골목 가운데에서도 밝게 빛나며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는 은발. 자신의 빠르기로 옷자락도 베지 못하고 머리카락이나 베었다는 것에 자존심이 상했으나 몸을 유연하게 놀리며 머리를 향해 다가오는 목검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은 것도 순간이었다. 스스로의 반응에 놀랄 겨를도 없이 처음의 그 묵직한 기세로 허리를 양단해오는 기운에 최대한 몸을 빠르게 비틀며 그 범주 안에서 빠져나와야만 했다. 생각보다 검로가 매섭다. 살기는 없지만 무심한 검세에 날카로운 송곳이 숨겨져 있는 것처럼 영활하게 움직이는 검이 곧바로 목을 날려버릴 것만 같은. 잠깐.
" 자기보다 어린 사람을 자기고 노는 겁니까? 그건 무슨 악랄한 취미인지 궁금한데요? 당하는데 영 약해서요. 유리검이라구요. "
" 굳이, 피를 보고 싶지는 않아서. 요 녀석아 그러니까 그만하고 이만 가지 그래? 아직 살인죄는 성립하지 않았다고. "
" 저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 것 같아요? "
" 여긴 카부기쵸야. 꽤 음침한 동네라고 여기. 신고하면 꺼림직한건 우리라서. "
나직하면서 한숨이 섞인 목소리에 그의 무심함이 담겨 흐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허리를 양단할 듯 쳐들어오던 검은 어느새 전과 같이 그의 어깨에서 톡톡 소리를 내며 튕겨 올라가고 있을 뿐. 더 이상 흥이 나는 것도 아니고. 귀찮게 됐네.
" 형씨가 내 흥을 깨버렸으니까. 다음엔 형씨가 날 맞이해주는거에요. "
" ....... 긴상이 인기가 많은 건 알지만 어린 아이와 짝짝꿍할 나이는 아니랍니다. 그러니까 이만 집에 가세요. 응? "
" 뭐, 그 쪽이 보기 싫다고 외면할 수 있는 단계는 날 방해할 때부터 넘어 섰습니다만. 뭐, 기대하세요. "
" 이거 똥 묻은 놈이 겨 묻은 놈 욕한다고. 에잉.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려고. "
" 아, 형씨 이름은 뭐에요? "
곱슬거리는 은발이 바람에 휘날리며 서로 몸을 부대낀다. 꼬이고 꼬인 심보를 얘기하고 있는 지도 모르지. 라는 시덥지 않은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귀에 내려앉는 조용하고도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긴토키 - . 사카타 긴토키다 요녀석아.
부끄러워하는 건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름만 툭 내던진 채 자신의 앞에 쓰러져있는 버러지들의 생사여부를 확인하는 모습이 꽤 인상깊다. 수 많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 본 사람처럼 한 없이 태연하고 나른해서. 긴토키. 형씨 이름이 긴토키라고.
" 소고. 오키타 소고입니다. 신센구미 1번대 대장이라구요. "
" .... "
못 볼 걸 봤다는 눈으로 자신을 마주하다 고개를 살레살레 흔들고 터벅이는 발걸음으로 물러서는 모습이 보인다. 그쪽이 누구든 내가 무슨 상관이냐며 중얼거리고 나아가는 그는 반 쯤 죽어있는 것처럼 피투성이가 되어있는 남자 둘을 거뜬히 들어올리고는 그대로 묵직한 검세와 같은 뒷모습으로 떠났다. 자신이 저렇게 죽어가고 있을 때 누가 나타나 구해줄 사람이 있긴 할까. 문득 떠올린 생각에 스스로 자조하는 김에 실실 웃어보인다.
안 되겠지. 차라리 지키고 있는 걸 빼앗고 괴롭히는게 내 취향이니까. 아, 잠깐 저 버러지들을 체포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뭐 어때, 망할 히지카타 엿이나 먹으라지. 신은 그 쓸모 없는 놈을 안 데려가고 뭐하나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