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토키X오키타
편애
(2편)
이사장이 어떤 사람일지에 대한 궁금증이 굉장히 많이 들었다. 그의 얼굴은 어떨지, 그는 어떤 사람일지. 어떤 사람이길래 그 모든 사람들이 몸을 숙이며 그에게 복종을 하려 하는지. 손으로는 해외로 나가기 위해 필요로 하는 물건들을 챙기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많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느긋하게 짐을 챙기곤 붉은 눈을 도록이며 목덜미를 가볍게 쓸어내자 알알이 붙어있는 땀방울들이 손에 묻어났다. 눈을 찡그려보지만 자신이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한 번 숨을 푹 쉬어내고 실장이 사라진 길을 따라갔다. 붉은 눈이 차갑게 굳는다.
느릿하게 나간 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내려와있으나 적막하기 그지 없다. 단 한번도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이사장의 얼굴과 정체를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수 많은 사람들이 내려와 있으나 장성한 가드들이 주변을 물린 터라 이사장의 모습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실장이 자리하고 있는 바로 옆으로 다가서자 아 오키타씨…… 라는 말을 끝으로 더 이상 입을 떼지 않는 실장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모두가 고요에 잠식되고 바늘 하나 찌를 곳 없이 펼쳐진 고요의 장막 속에 거대한 정문이 열리고, 그 사이로 유독 크게 들리는 단 한 사람의 구두소리가 귀에 생생하게 울렸다. 얼굴을 확인할 새도 없이 굽혀지는 허리에 긴 홀을 천천히 걸어오는 구두소리. 모두가 숨을 삼키고 단 하나의 바스락거리는 소리 없이 깔끔하게 허리를 숙인 채 그를 향해 절도 있는 인사를 보내는 장관. 그 누구라 할 지라도 그 장관 속에서는 압박을 느낄 만도 하건만 구두소리의 주인은 여유롭게 가드들 사이를 지나치며 내 시야에서도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사라졌다.
한 번 이쪽을 흘끔 보고 지나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으나, 걸음걸이에서는 늦춰진 기색이 없었으니 그저 감각이었으려니 할 뿐. 그것은 마치 하나의 파도 같이 다가왔다. 미동 없는 수면에 단 하나의 물방울이 튕겨져 그 파장이 수면 끝까지 가는 파동과도 같이, 그가 사라진 이후 입구에서부터 시작된 비틀림이 환상에 사로 잡힌 양 온몸을 굳히고 허리를 숙이고 있던 사람들의 감각을 일깨웠다. 허리를 일으켜 세우자 연신 식은땀을 닦아내던 실장이 이쪽을 보고는 따라가라는 듯 턱짓을 해 보인다.
“지금 들어가면 되는 겁니까?”
“아마 사가루전무님께서 이사장님과의 만남이 있으실 겁니다. 그 때 따라 들어가시면 될 거에요. 제가 일러드린 숙지사항만 잘 챙기시면 다른 문제는 없을 겁니다.”
“그 숙지사항이라는 게 거의 이사장님께 복종하라는 식이던데요.”
“어쩔 수 없죠. 위 분들이 까라면 까는 게 우리 같은 부하직원이 살 길이니까요. 이사장님은 참고로 블랑 드 블랑을 좋아하시니까, 나중에 심부름이라도 시키시면 그걸 준비하시면 될 겁니다.”
“취향 한 번 거창하신 분이시네요.”
혀를 끌끌 차며 실장이 얘기했던 이사장실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보통은 해외에서 생활하는 일이 많으며, 비자는 회사에서 알아서 처리해주고 출장 비용도 다 대준다고 하니 필요한 건 옷가지들과 여권뿐이라 들었다. 참 편리한 세상이다. 높으신 분 비위 맞춰주는 만큼 회사에서 지원해주는 것도 많다는 뜻인가? 문득 숙소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으나 해외지사에서도 사택이 있다고 했으니 그 사택에서 머무르게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할 따름이었다. 가장 높은 층. 엘리베이터를 한 번 갈아타고 전용 엘리베이터로 더 올라가야 하는 이사장실은 찾아가는 길부터 남달랐다. 엘리베이터 앞에 수두룩하게 서있는 가드들의 모습을 보며 아마 마피아가 있다면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상상도 해보지만 마피아라고 하기엔 신사적인 품격을 갖춘 가드들의 모습을 보며 과연 가드인지 아니면 또 다른 수행비서들인지 고민의 시간을 거쳐야 했다.
“이 곳은 이사장님께서 머무시는 공간입니다. 함부로 타인의 출입이 엄금된 공간임을 아실 텐데요.”
“이사장님을 앞으로 수행하게 된 수행비서 오키타 소고입니다.”
“사원증을 한 번 보여주시겠습니까?”
사원증을 내어주고 나니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제 뒤에 있는 인식기로 이런 저런 정보를 확인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이 엘리베이터 앞으로 다가오는 순간부터 느껴지던 한결 같은 시선들. 무심함을 가장하고 있으나 군기가 바짝 들어가 있는 모습들은 여기서 나의 신분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을 경우 그대로 그들의 총구가 나를 향할 것 임을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이렇게 삼엄한 경계를 할 정도로 그 자리가 위험하다는 뜻인가 싶어 한 편으로는 딱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확인이 다 되었다며 이 쪽에게 사원증을 넘기고서 직접 엘리베이터의 문을 열어주며 이쪽의 행동에 더 이상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장 높은 층의 버튼을 누르자 그만 사용하는 전용 엘리베이터라는 사실을 증명하듯이 부드럽게 운행이 되면서 순식간에 이사장 실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이사장 실이 있는 곳은 조용하고 적막한 공간. 그가 유달리 시끄러운 곳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증명하듯이 개미 한 마리가 빨빨거리고 돌아다니는 소리도 들릴 만큼 조용하다. 엄중하게 세워져 있는 기둥들 사이로 카메라가 몇 대 돌아가고 눈에 보이진 않지만 몇 가닥의 시선이 이쪽에 들러 붙는 게 느껴졌다. 사가루 전무가 먼저 이동하는 모습을 보았으니, 아마 안에 있으리라 짐작하고 긴 복도 끝에 그 넓은 공간에 하나 밖에 없는 문을 열고 들어가자 넋을 놓을 만큼 아름다운 공간이 눈 앞에 펼쳐졌다. 7성급 호텔의 스위트룸이라고 해도 믿을만한 공간이 회사의 최상층에 위치하고 있을 줄 누가 알까. 그때 뒤에서 달칵이는 문소리가 들려왔다.
“주인보다 먼저 들어 와 있는 개는 처음 보네요.”
지독히도 퇴폐적인 목소리. 약간은 피로에 젖은 듯 잠겨있으나 본 목소리도 그리 높지 않으리라 장담했다. 단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목소리에 뒷목이 결리도록 빳빳하게 긴장이 몰려온다. 식은 땀이 손바닥을 가득히 적시지만, 마이웨이적 성향이 어디 가는 건 아닌지 방정맞은 주둥아리는 제어가 되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날뛴다.
“사람을 더러 개라니요. 그런 버러지 같은 변태적 성향을 대놓고 드러내면 상대가 많이 당황스럽지 않겠습니까?”
“사람을 두고 개라고 하는 건 변태지만, 개를 두고 개라고 하는 건 엄연히 정상인의 발언에 속합니다. 제 구두 코나 핥으러 온 버릇없는 입을 가진 개가 맞으실 텐데요.”
“이거 엄연히 인권모독 아닙니까?”
“그런 게 통했으면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얘기도 나오지 않았을 겁니다. 사회생활 하루 이틀 아니잖습니까. 이 바닥에서 굴러 먹다 보면 본인이 노예라는 사실을 깨닫지 않던가요?”
귀엽네, 라며 남자는 살짝 숙여진 고개를 푹 눌러버리곤 신발을 벗고 슬리퍼에 올라선다. 눈에 보이는 건 근육이 잡혀 매력적인 핏을 자랑하는 종아리 부분과 흠 하나 없이 신발장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남자의 신발. 딱 봐도 억소리나게 생긴 신발양반을 보며, 내 월급과 신발 가격을 비교해보고 있을 무렵에 들어오라는 아마도 이사장으로 보이는 남자의 말이 들려왔다. 뭔가 모르게 사람 심기를 자극하는 단어를 사용하는 작자, 다시 말해 성질 더러운 작자에게 굽실거려야 하는 본인의 처지가 거지같지만 까칠하고 과묵하다던 소문과는 달리 그리 불편한 상은 아니라 다행이지 싶었다. 말 한마디 걸지도 못하고 눈치만 보는 건 성격상 맞지 않단 말이야.
신발을 벗고 슬리퍼를 신으며 안으로 발을 디디니 푹신한 융단이 느껴진다. 신발을 갈아 신는 부분의 닳기로 봐서는 꽤 오래된 융단임이 분명함에도 융단의 색이 선명한 것을 보아 꽤 자주 관리를 하는 모양이다. 이런 쓸모 없는데 돈 지랄을 할 망정이었으면 월급이나 올려주던가. 주변을 둘러보며 두리번거리고 있을 즈음에 거실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은은하게 집안 전체를 감싼 빛이 모호하게 소파에 앉아있는 사람의 선을 드러낸다. 선명한 은색 머리. 넓고 단단해 보이는 어깨와, 언젠가 맡았던 짙은 초콜릿 향기. 그리고 사가루 전무보다도 더 색정적으로 보이는 자태. 하지만 그에게 다가갈 수록 사람 좋아 보이는 사가루 전무와는 달리 다른 사람들의 접근을 막는 분위기에 숨막히고 갑갑하다.
“입사한 지는 몇 년정도 되셨습니까?”
“이제 3년차입니다.”
“낙하산인사?”
“스카우트제의가 들어왔으나 교육과정에 있어 낮은 단계부터 밟고 올라오라는 명령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이 뭔지는 알고 계십니까?”
“교육과정에 있었습니다만, 기본적인 교육은 완료했습니다.”
소파에 앉아 서류를 들여다보며 뒷모습만 보이던 남자가 서류를 내려두고 일어났다. 고개를 숙이고 눈을 아래로 떨구자 이쪽 시야에 남자의 발이 침입해 들어온다. 진득한 초콜릿 향, 사가루 전무가 토바코 향이 진하게 묻어났다면 이 남자에게선 초콜릿 향이 강하게 풍긴다. 앞으로 사람을 헷갈릴 리는 없겠다. 이렇게 강한 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두고 헷갈리는 놈이 병신이지 않을까.
“고개 들어.”
나직한 말에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리자 앞에 있는 작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느닷없는 반말에 반발심이 생길 만도 하건만 손 끝으로 이쪽 턱을 세워 올리는 태도부터 말투까지 지극히 자연스러워 그런 감정은 생기지도 않는다. 사가루 전무를 보면서 느긋한 사자를 생각했었던 것 같은데 사가루 전무가 사자라면 이 사람은 그 위에 존재하는 황룡쯤 되려나. 부담스러울 정도로 강한 사람이다. 단순히 내리깐 눈빛에서부터 사람을 질리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 피로에 젖어 눈빛이 흐릿하게 번지지만, 그건 그대로 붉게 물들어 다리가 풀릴 정도로 유혹적인 눈이다. 화려하고 자유분방하기 짝이 없는 사가루와는 달리 이 쪽은 조용하고 차분하여 괴로울 정도로 상대를 억누른다. 짓눌린 상대는 그 억압을 일고의 가치도 없이 받아들일 테고.
은은한 빛 무리 속에 홀로 고고한 그가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이쪽과 눈을 맞춘다. 이쪽도 그를 눈에 담는다. 아니, 눈을 떼지 못한다. 붉은 홍채가 나와 마주한 순간부터 마법에 걸리기라도 한 듯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다. 불빛에 비치는 솜털 하나까지도 존재감이 강한 사람이다. 온몸으로 저가 범상치 않는 인간임을 밝히는 사람. 부드러운 분위기가 새어 나오지만 그 분위기로도 제왕의 기운을 숨기기는 어려운 법이다. 제왕학을 배울 일도 없고 요즘 세상에 배우는 사람도 없겠지만, 제왕학에서 추구하는 완벽한 제왕의 상이 저런 사람이지 않을까. 살풋 웃어보이는 미소에 위압감이 언제 있었냐는 듯이 사라지지만, 감히 대응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수컷의 냄새가 자욱하게 번진다. 무서운 사람이다. 그리고 미치도록 잘난 사람이다. 남자에게 성적 매력을 자극시킬 만큼 잘난 사람.
“괜찮은 인재를 뽑은 것 같네요. 저번엔 너무 빌빌거려서 보기 싫었는데, 당차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일은 시켜봐야 알겠지만 당신이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아마 편한 직장이 될 테니 죽도록 한 번 여기서 기어보세요. 주둥이가 맹랑한 만큼 일처리도 확실할거라 믿습니다.”
“성심 성의껏 보필하겠습니다. 나름대로 스카우트 제의를 받은 인재란 말이죠.”
“그 제의를 받았던 인간들이 이 바닥에서 버티지 못하고 나가 떨어졌다가 사가루가 구제해준 케이스를 한두 번 본 건 아니라서. 애초에 그 정도 인재가 아니면 이 자리에 오지도 못하고.”
서늘한 말끝에 입을 다문다. 사자는 포효를 하지만 황룡은 무심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볼 뿐이다. 입 안이 간질거리며 빈정거리는 언어가 튀어나오려다가 그대로 막힌다. 정확히 말하면 길게 찢어진 눈매 새로 보이는 붉은 눈동자에 어린 경고가 이 쪽의 행동을 제제한다. 아마도 오랜 마이웨이 라이프를 이 사람에 의해 끝내게 되지 않을까 하는 예감 아닌 예감이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답답한 침묵 상태가 유지된 채로 남자는 내 어깨를 툭툭 치고는 본래 제 자리로 돌아가 깔끔하게 정리된 서류철을 뒤적이며 수도 없이 쏟아지는 통화를 받는다. 당최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들이 난무하는 통화내역에 별 관심을 두지 않고 하릴없이 다음 오더를 기다리고 있을 무렵 칼칼하게 잠긴 목소리가 들려온다. 수 없이 통화를 주고 받는 목소리는 지독하게 섹시하고 낮게 울려 심장을 마음대로 움켜쥐는 마력이 있으나 중간 중간 섞이는 기침 소리가 거슬렸달까. 별 의미 없이 그 기침소리가 거슬린다는 이유로 폭신한 융단을 밟아대며 물통이 올려져 있는 탁자로 다가가 물잔을 그의 앞에 대령하니 이사장이 이쪽을 보고는 날이 서 있는 눈매를 가볍게 휘어 보이며 살갑게 웃는다. 다시 서류철과 온갖 자료가 올라와있는 노트북으로 고개를 돌리며 일에 집중하는 모습이 눈에 보이지만, 머릿속에는 그가 웃어보이며 그려낸 곡선만이 남아 잠시 정신을 멍하게 한다. 저렇게 웃어주면 저 작자가 내 목을 조른다고 해도 사랑스러워 보이지 않을까?
“그렇게 멀뚱멀뚱 서있을 겁니까? 불필요한 시간낭비 하지 마시고 당신이 해야 할 일을 확인해 두는 게 맞지 않을까요. 그대로 있다간 내일 일정도 따라가지 못할게 뻔해 보이는데. 아, 그리고 전 물에 얼음을 넣어먹는 편입니다. 이왕이면 모시는 상관의 취향 정도는 알아두시죠.”
끝없이 이어지던 통화 속에 흘러나온 한줄기의 말이 나에게 향한다. 뭔가 모르게 선행을 하고도 쌍욕을 먹은 기분이 이럴까. 평소에 안 하던 착한 짓도 했는데 저 작자 말하는 꼬라지가 다시는 그에게 뭔가를 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단념케 만든다. 속에서 올라오는 불길을 가득히 발에 담아 푹신푹신한 융단을 마치 융단이 이사장이기라도 하는 양 깔아뭉개며 밖으로 나서려 하는 순간 뒷덜미가 잡힌다. 그대로 끌려들어가 던져진 곳은 그가 일하던 거실 바로 맞은 편에 있던 방 안. 모던한 느낌이 물씬 풍기고 컴퓨터 한 대와 침대가 자리하고 있는 공간. 다른 물건들은 따로 놓여있진 않지만 비어있는 수납장들이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그 공간에 던져진 채 방문을 닫고 나가는 이사장을 어이없다는 눈으로 쳐다보지만 그래 봤자 일에 열중한 누군가는 그 눈빛을 보지도 못할 것이 분명했기에 괜히 혼자 기운 빼는 것 같아 컴퓨터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푹신한 의자에 앉아 제가 모시게 된 빌어먹을 상관에 대해 떠올리니 첫만남부터가 당황스러운 상황의 연속이다.
만난 곳은 회사 최상층에 위치한 이사장의 집 비스무리한 공간이지, 만나자마자 개취급이나 당하고 생긴 건 지랄 맞게 잘생겨서 비서가 이사장에게 성적매력을 느끼질 않나. 그렇다고 뭐 제 상관의 일정을 달달 외우고 있는 것도 아니고 본인이 항상 알아서 관리한다며 수행비서는 단지 비상사태에 대비하기 위함이라 할 일도 딱히 없고. 말마따나 일정이라도 외워보자 싶지만 아는 게 없는데 정리할 건 어디있겠냐 이 말이다. 전 수행비서가 있는 것도 아니라 뭔가 넘겨받은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나름대로 이사장님 수행비서를 해보셨다는 실장님이 준 언질은 딱히 쓸모도 없다.
한숨을 내쉬며 시간이라도 때울 겸 컴퓨터를 켜자 화면 가득히 하나의 창이 떠오른다. 목록을 차근히 읽어보니 업무 관리에 대한 유의사항과 작성자의 세심함이 돋보이는 소소한 팁들이 적혀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부서별 업무 현황에 대해 기록이 되어있고, 역시나 깔끔한 솜씨로 감사평가와 각 부서에 대한 관리 감독 현황에 대해서도 작성이 되어있다. 부서에 대한 분석과 임원급 인사들에 대한 분석도 정리되어 작성되어 있었으며 하청업체별 평가기록도 작성되어있었다. 하루 이틀 사이에 완성될 수 있는 기록이 아니었다. 꾸준히 누군가가 정리하여 기록하여 놓은 것이다. 사내에서 일어나는 사건 사고와 비리에 관련된 사안도 빠짐없이 기록되어있었으며 인사대상에 대해서도 철저한 분석노트가 작성되어있었다. 그 중에는 내 부분도 작성되어있었으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공란으로 남겨져 있었다. 그저 이사장 직속이라는 두 어절만 작성되어 있었을 뿐.
“당신이 해야 할 일입니다. 앞으로 제 옆에 있으면서 끊임없이 관리 감독 결과가 올라올 겁니다. 그 결과를 분석하여 그 자료와 비교해 허위결과를 가려내셔야 합니다.”
“이제 입사한지 3년 된 사람에게 뭘 믿고 이런 일을 맡기시는 겁니까?”
“내 눈을 믿고 당신의 눈치를 믿습니다.”
그가 가늘게 눈을 찢으며 웃는다. 잔인한 웃음이다. 겁먹어 덜덜떠는 아이를 한 입에 집어삼키려 아가리를 크게 벌린 용의 웃음. 은색으로 가득 찬 외관과는 달리 그는 검다. 검디 검어서 그대로 곁에 있는 사람을 유혹해 물들여버릴 것 같은 암흑이다. 재수없지만 참 잘난 형씨다. 그래서 나 역시도 용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밀면서도 환각에 빠지기라도 한 듯 좋아라하며 그에게 다가서게 된다. 미칠 노릇이다. 동성의 상관에게 성적 호감을 느껴서 어쩌자는 건지…….
“맡은 일이니 하긴 해야죠.”
“난 완벽을 추구합니다만, 당분간은 훈련이라 생각하고 주인을 물지 않는 이상은 결점에 대해 논하지 않겠습니다.”
붉은 입술로 내뱉는 언행들이 그리도 얄미울 수가 없다. 살짝 헐겁게 풀어낸 넥타이와 두 개정도 풀려있는 목덜미에서 짙은 향이 풍긴다. 자스민과 초콜릿향. 향기롭고 달콤하지만 순식간에 머리를 멍하게 만들어버리는 마약같다. 붉은 눈을 마주할 수가 없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잘난 형씨를 바라보지만 살짝 어긋난 곳을 바라 보는 게 전부다. 그런 나의 동공을 따라 그의 동공이 닿아온다. 붉은 눈이 핏빛으로 물들며 이쪽을 아득하게 바라본다. 아니 그의 향에 취해 내 쪽이 아득해지는 지도 모르겠다. 속을 꿰뚫어 읽는 듯한 눈빛에도 대응할 수가 없다. 단지 무표정한 얼굴로 감정을 숨기려 노력할 뿐.
“잘난 형씨인건 알겠는데 자꾸 개로 취급하지 마시죠. 그런 사디스트적인 말에 항마력이 없어 꽤 아픈데요.”
“본인이 유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앞으로 거주는 이 곳에서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네?”
“이사장 수행비서라는 직급이 좀 위험하기도 하고, 거주지에서 출퇴근하시게 되면 비행기 시간을 놓칠 위험도 있기 때문에.”
앞으로 끝없이 동성에게도 페로몬을 풀풀 풍기는 남정네랑 어떻게 살라고. 어이없어 하며 고개를 내젓지만 완벽하게 대칭을 이루며 미소를 짓는 모습에서 알아차렸어야 했다. 그의 수마에서 감히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첫만남에서 그런 사실을 알기란 쉽지 않은 일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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